현실을 감당할 준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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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하나냐 댓글 0건 조회 427회 작성일 24-02-24 20:15본문
현실을 감당할 준비
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작아집니까, 커집니까? 예수님은 우리를 아늑한 가정이라는 작은 세계에 가두십니까, 아니면 벅찬 탐험이 있는 큰 세계로 이끄십니까? 수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빈약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불안불안합니다. 이 빈약한 삶에 '기독교적'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때 불안한 마음은 커집니다.
이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한 결과입니까? 신중함이? 안전제일주의가? 예측 가능한 인정이? 예수님을 따라갈 때 어느 정도나 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? 많이 아니면 조금, 어느 쪽입니까? 최소한의 현실로 버티면서 다량의 공상으로 보충하고 그것에다 '기독교적'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. 그러나 복음의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살필 때 [그런 것의 실체가 드러나기에] 불안한 마음은 줄어듭니다.
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 이상의 현실로 이끄십니다. 우리는 진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.
- 유진 피터슨의 『잘 산다는 것』 중에서
예수님은 바쁘신 와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. 우리가 현실을 감당할 힘을 어떻게 준비하고 공급받아야 하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. 기도 없이 현실을 감당할 준비는 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. 현실을 감당할 준비를 잘 하고 있습니까?
마가복음 1장35절-37절
“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”
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 삶은 작아집니까, 커집니까? 예수님은 우리를 아늑한 가정이라는 작은 세계에 가두십니까, 아니면 벅찬 탐험이 있는 큰 세계로 이끄십니까? 수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빈약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불안불안합니다. 이 빈약한 삶에 '기독교적'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때 불안한 마음은 커집니다.
이것이 그리스도를 추구한 결과입니까? 신중함이? 안전제일주의가? 예측 가능한 인정이? 예수님을 따라갈 때 어느 정도나 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? 많이 아니면 조금, 어느 쪽입니까? 최소한의 현실로 버티면서 다량의 공상으로 보충하고 그것에다 '기독교적'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. 그러나 복음의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살필 때 [그런 것의 실체가 드러나기에] 불안한 마음은 줄어듭니다.
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 이상의 현실로 이끄십니다. 우리는 진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.
- 유진 피터슨의 『잘 산다는 것』 중에서
예수님은 바쁘신 와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. 우리가 현실을 감당할 힘을 어떻게 준비하고 공급받아야 하는지 보여주신 것입니다. 기도 없이 현실을 감당할 준비는 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. 현실을 감당할 준비를 잘 하고 있습니까?
마가복음 1장35절-37절
“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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